언론보도

<한겨레> 백기완이라면 외쳤을 '따끔한 말' "이거 봐 윤석열이! 내 말 들어"

“이거 봐~윤석열이! 내 말 들어” 백기완이라면 외쳤을 ‘따끔한 말’

[짬] ‘백기완 마당집’ 여는 채원희·박점규·노순택

‘백기완 마당집’ 개관을 위해 애쓴 실무자들이 26일 오후 2층 특별전시관의 전시물들을 둘러보고 있다. 자신들을 내세우고 싶지 않다는 뜻을 좇아 옆모습이나 뒷모습을 담았다. 왼쪽부터 박점규 백기완노나메기재단 노동담당 이사, 사진작가 노순택, 채원희 백기완노나메기재단 사무처장.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백기완 마당집’ 개관을 위해 애쓴 실무자들이 26일 오후 2층 특별전시관의 전시물들을 둘러보고 있다. 자신들을 내세우고 싶지 않다는 뜻을 좇아 옆모습이나 뒷모습을 담았다. 왼쪽부터 박점규 백기완노나메기재단 노동담당 이사, 사진작가 노순택, 채원희 백기완노나메기재단 사무처장.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이거 봐~ 윤석열이! 나 알잖아, 내 말 들어.

서울 대학로 뒷골목 한 건물 2층 창밖에 이런 문구가 걸렸다. 지나가던 시민들이 고개를 들어 문구를 확인하고는 재밌다며 웃거나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문구 아래에 적힌 건물 이름은 ‘백기완 마당집’. 백기완(1933~2021) 통일문제연구소장이 사무실로 쓰던 곳을 새롭게 단장해 만든 기념관이다. 5월1일 노동절 공식 개관을 앞둔 지난 26일 오후 현장에서는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었다.

“1970, 80년대에는 대학이나 작업장 등에서 창문 농성을 많이 벌이지 않았습니까? 그 생각을 떠올리며, 지금 세상을 향해 선생님이 하실 법한 따끔한 한 말씀을 적어 봤습니다. 선생님의 평소 말투를 살려서 썼고, 앞으로도 그때그때 필요하고 절실한 문구로 바꾸어 달 생각입니다.”

기념관 전시 자문 역할을 맡은 사진작가 노순택은 이렇게 설명했다. “옛날 사람 백기완이 아니라 여전히 외치는 백기완을 보여주고 싶었고, 앞으로는 선생님이라면 하실 만한 말씀을 공모를 통해 고를 수도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백기완노나메기재단이 5월1일 ‘백기완 마당집’ 개관을 앞두고 기자간담회를 연 30일 오전 백기완 마당집이 열려 있다.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백기완노나메기재단이 5월1일 ‘백기완 마당집’ 개관을 앞두고 기자간담회를 연 30일 오전 백기완 마당집이 열려 있다.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백기완 마당집’은 1층 상설전시관과 2층 특별전시관으로 구성되었다. 상설전시관에는 △통일꾼, 예술꾼, 이야기꾼, 우리말 사랑꾼, 노동해방꾼 백기완의 이야기 △‘님을 위한 행진곡’에 얽힌 이야기 △백기완 민중사상의 핵심 ‘노나메기’란 무엇인가 △육필원고와 아끼던 물건, 소환장·벌금고지서 등을 담은 유물함과 신학철 화백의 그림 ‘백기완 부활도’, 백기완 선생이 병실에서 마지막 순간에 힘겹게 쓴 네 글자 ‘노. 동. 해. 방’, 사진작가들이 찍은 선생의 사진 등이 전시되고 영상물 ‘산 자여 따르라’가 상영된다. 백기완 선생이 원고를 쓰고 사람들을 만나던 방 ‘옛살라비’는 선생이 평소 아껴 읽던 책들과 원고뭉치와 함께 생전 모습 그대로 재현되었다.

사무실 단장해 1일 개관…육필 원고 등 상설 전시

“이렇게 꾸며 놓고 보니까 마치 선생님이 살아 돌아오신 것 같아 마음이 뭉클하네요. 선생님이 병상에서 ‘내가 너한테 다 맡기고 간다’ 하신 말씀이 부담이 되어서 잠을 잘 못 이룰 정도였습니다. 선생님을 기억하는 공간 하나는 남겨야겠다는 사명감으로 자료를 찾아 정리하고 배치했어요.”

1990년대 이후 30년 가까이 백기완 선생의 비서실장이자 운전사, 대변인으로 선생을 가까이에서 모셨던 채원희 백기완노나메기재단 사무처장이 말했다. “백 선생님은 우리말을 사랑하셔서 ‘박사’라는 말도 ‘꿰찬이’라고 쓰셨는데, 채원희씨야말로 ‘백기완 꿰찬이’라 할 정도로 선생님의 분신과도 같았다. 수많은 노동자들은 백기완의 친구이기도 했지만 채원희의 친구이기도 했다”라고 노순택 작가가 거들었다.

‘백기완 마당집’ 들머리에 걸린 이종구 화백의 그림 ‘별이 된 백기완’(2022, 오른쪽)과 백기완 선생의 미발표 시 ‘헌 신문을 보다가’. 백기완 마당집 제공

‘백기완 마당집’ 들머리에 걸린 이종구 화백의 그림 ‘별이 된 백기완’(2022, 오른쪽)과 백기완 선생의 미발표 시 ‘헌 신문을 보다가’. 백기완 마당집 제공

‘백기완 마당집’ 1층 상설전시관 전경. 백기완 마당집 제공

‘백기완 마당집’ 1층 상설전시관 전경. 백기완 마당집 제공

‘백기완 마당집’ 2층 특별전시관 전경. 백기완 마당집 제공

‘백기완 마당집’ 2층 특별전시관 전경. 백기완 마당집 제공

백기완 마당집 1층, 백기완 선생의 집필실을 재현한 ‘옛살라비’ 전경. 백기완 마당집 제공

백기완 마당집 1층, 백기완 선생의 집필실을 재현한 ‘옛살라비’ 전경. 백기완 마당집 제공

‘노동자들과 인연’ 글·사진 전시…“오늘의 문제 사랑방”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층계에는 백기완 선생의 한살매(생애)를 민중사와 겹쳐 소개해 놓은 사진과 글이 장식하고 있다. 2층 특별전시관은 ‘비정규직 노동자 백기완’을 주제로 삼아, 선생이 생애 마지막 20년 동안 함께한 비정규직 및 해고 노동자들과의 인연을 사진과 글에 담았다. 노순택 작가가 골라 배치한 사진들에 설명글을 쓴 박점규 백기완노나메기재단 노동담당 이사는 전시 취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1층 상설전시관이 백기완 선생을 중심으로 꾸며졌다면, 2층은 선생님이 주목했던 사람과 사회를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아이엠에프(IMF)를 거친 뒤 2천년대 한국 사회의 최대 현안이 비정규직 노동 문제인데, 선생님은 생애 마지막 20년 동안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손을 잡아 주셨어요. 특히 이번 전시는 주인공들이 참여했다는 데에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태안화력발전소 김용균 노동자의 어머니가 오셔서 사진 액자를 직접 끼우셨어요. 기륭전자·기아차·재능교육 등의 노동자들도 직접 액자를 걸고 사진설명도 붙였습니다.”

노동자들이 싸우고 때로 숨진 현장이라 사진 속 백기완 선생은 주먹을 불끈 쥐고 외치거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드물게 선생이 활짝 웃는 사진이 있는데, 2014년 스승의 날 잔치 때 찍은 것이었다. 김수억 전 민주노총 금속노조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지회장이 해고됐다가 복직해 받은 첫 월급으로 마련한 이 자리에서 선생은 모처럼 웃는 얼굴로 노동자들과 함께했다. 그 사진 액자들 앞에 우연인 것처럼 당사자인 김수억이 와 섰다. 마침내 정규직으로 신분이 바뀌어 사원번호를 받은 26일, 그가 선생께 인사차 기념관을 찾은 것이다. “지금도 거리의 투쟁 현장에 있으면 선생님이 그곳에 안 나오셔도 여전히 병원에서 저희를 응원하고 계신 것 같다는 마음이 든다”고 그는 말했다. 김수억의 말을 받아 노순택 작가가 결론 삼아 덧붙였다.

“많은 기념관이 대상 인물을 역사화하고 고정화하기 일쑤인데, 우리는 백기완 선생님을 역사적 인물이나 위인으로 대상화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노동자와 시민들이 공부하러 오는 공간이 아니라, 과거에 선생님을 찾아와서 자신들의 문제를 상의했던 것처럼 오늘의 문제를 고민하는 사랑방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백기완 마당집 개관에 즈음한 기자간담회가 30일에 열려 신학철 백기완노나메기재단 이사장과 명진 스님, 손호철 교수, 유홍준 교수 등이 인사말을 하고 채원희 사무처장과 노순택 작가, 박점규 노동이사가 전시 설명을 했다. 1일 오후 1시 정식 개관한 뒤 6일 오전 11시에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시민들, 재단 지킴이와 후원회원, 양대 노총 등이 함께하는 집들이 행사가 열린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2024. 4. 30. 18:45